[세하나타] 좋아하는 거야
"좋아해."
금방이라도 꺼질듯 옅고 자그마한 목소리는 파르르 떨리며 층계참에 메아리쳤다. 숨소리마저 크게 들릴 것 같은 잔인한 적막이 몇초간 이어졌다. 셋 중 누구도 숨을 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적어도 모퉁이 뒤에 서서 그 광경을 엿보던 나타는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여자아이의 그 말에 세하는 눈만 깜박였다. 한동안 대답을 하지 않아서, 여자애도 나타도 숨을 죽이고 있는 수 밖엔 없었다. 눈만 좌우로 굴리고 있던 세하가 결국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온 것은 긴 한숨이었다. 그리고 이어, 조금 짓눌린 목소리가 짤막하게 튀어나왔다.
"미안."
여자애가 와락 울음을 터트렸다. 작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어깨를 떨며 우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보여서, 세하가 당장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어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세하는 그렇게 하는 대신 여자애의 왜? 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좋아하는 사람 있어."
그 이후는 잘 모르겠다. 소리가 나지 않게 살금살금 걸어 복도로 나간 다음 정신없이 뛰었던 것 같다. 정신을 차려보니 노을에 주홍빛으로 물들어있는 교정 구석의 등나무벤치까지 와 있었다. 귀에서 이명이 울릴 정도로 산소가 부족했다. 빠르게 호흡하며, 나타는 자켓 소매로 볼을 문질렀다. 볼이 뜨거운건지 자켓이 차가운건지, 까슬까슬한 감촉과 함께 찬기가 훅 끼쳐왔다. 나타는 가장 구석에 있는 벤치를 골라 털썩 주저앉았다. 세하는 아마도 그 뒤, 세하를 기다리고 있을 나타를 찾아 교실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나타는 지금 교실에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조금 기다려 보다가, 혼자 돌아가겠지.
지금은 세하를 보고싶지 않다. 아니, 평소에도 꼴보기 싫은 녀석이다. 제발 꺼져줬으면 하고 바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나타는 이를 지긋이 악물었다. 목이 따끔거리는건 아마 갑자기 달려서 그럴거야. 눈이 뜨거운건 아마 화가 나서 그럴 거야. 머리가 아픈 것도, 눈물이 날 것 같은 것도, 다. 화가 나서. 그래서.
이세하가 너무 나빠서.
*
나타는 막 자라난 아이였다. 소위 조폭이라고 불리는 조직. 그중 한명의 아들로 태어나, 엄마가 버리고 도망가는 바람에 편부 슬하에 남았지만 아버지의 직업이 직업이다보니 제대로된 양육이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심지어 아버지는 나타가 일곱살 때 내부 싸움에 휘말려 칼을 맞고 죽어버렸다. 나타는 천덕꾸러기였으나, 살아남는 방법은 알았다. 철들기 전부터 불법이 당당히 자행되는 것을 보아왔으니 국가기관에 대한 신뢰가 있을리가 없다. 나타는 이곳에서 쫓겨나면 살 길이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도망은 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 사이에 끼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니었기에 살갑게 굴지는 않았다. 다 크면, 스스로 뭐라도 할 수 있게 되면 반드시 도망칠 것이다. 막연히 그렇게만 생각했다.
나타가 살고 있던 곳은 심지어 외부와 격리된 곳이었다. 며칠에 한번은 꼭 시체를 보게되는 시골 한구석의 폐타이어 공장 안에서 나타는 아무거나 먹고 아무렇게나 잤다. 누군가가 나타를 발견할 수도 없었고, 설사 발견한다 해도 도움을 주겠다고 나서지는 못했다. 그곳은 그런 곳이었으니까. 어린아이가 홀로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나타의 세계가 바뀐 것은 열두살 때의 일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경찰이 공장에까지 들이닥쳤다. 삼촌이라고 불렀던 남자들이 줄줄이 연행되는 와중에 나타는 도망치려다 경찰에게 붙잡혔고, 경찰은 이 들개같은 아이에게 연고가 전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시설에 던져버렸다.
도시의 시설은 나타에게 신세계였다. 모두가 나타에게 친절했고,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을 먹어보았으며 깨끗한 옷을 입을 수 있었고 잠자리가 푹신하고 따뜻했다. 아마도 어렸을 때엔, 아빠가 살아있고 엄마가 도망가기 전엔 이런 생활을 했었을지도 모른다. 나타는 막연하게 그렇게 생각했으나 기억이 나지는 않았다. 시설에 온 첫날, 그렇게 몸을 사리고 경계하면서도 깨끗이 씻고, 새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따뜻한 방의 깔끔한 침대에 누웠을 때 나타는 돌연 울음을 터트렸다. 아무도 알지 못하게 혼자 숨을 죽여서 울었다. 안심이었을까, 유년시절을 짓밟아버린 부모에 대한 분노였을까, 자신에 대한 연민이었을까. 이유는 아무래도 좋았다. 나타는 오래 울었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에도 흐르지 않던 눈물이었으므로, 어머니가 떠났을 때는 기억이 나지 않으므로, 나타는 자신이 처음으로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랬는지도 모른다.
전혀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2년간 나타는 시설 내에서 혼자 속성으로 교육을 받았다. 다행히 머리가 나쁘지는 않은지 초등학교 과정까지 무탈하게 머릿속에 집어넣을 수 있었다. 문제는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생겼다. 나타는 아이들과 어울릴 수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부모가 있는 따뜻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과 나타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었는데, 나타도 아이들도 그것을 이해할 만한 나이가 되지 않았으니 자연스레 괴리감이 생겼고, 그 괴리감은 적대로 표면화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겉돌기만 했다. 다가오는 아이도 있었으나, 모두 나타의 거친 성격과 상스런 말투에 질색을 하며 떨어져나갔다. 은근히 따돌려지는 분위기가 형성이 되고 난 후에는 소위 잘 나가는 그룹 중 가장 힘센 아이의 괴롭힘이 이어졌다. 폭력과 피, 그리고 시체로 이어지는 환경에서 자란 나타가 그 유치하기 그지없는 괴롭힘을 그대로 당하고 있을리가 없었다. 가벼운 시비에도 주먹으로 응대했고, 중학교 3년 내내 학교를 옮겨다녔다.
고등학교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래도 꽤 오래 지낸-그래봤자 1년이었지만- 시설의 원장은 나타가 고등학교에 입학하자 마자 사고를 치고 또 전학을 가야했을 때 이제 고등학생이 되었으니 제발 폭력은 자제하라고 애원하다 시피 했다. 양심이라는건 뭔지 알지도 못했지만 어쨌거나 학교를 옮겨다니는 것이 영 귀찮았던 나타는 그러마고 약속을 했다. 대신 시비거는 놈들이 없을 때라는 조건을 붙였다.
그리고 1학년 2학기에 전학을 온 신강고에서 만난 녀석이 바로 이세하라는 녀석이었다.
이세하는 반장이었다. 1학기때 얼결에 반장이 되었는데 담임선생님이 다시 뽑기 귀찮다는 이유로 2학기에도 계속 반장을 맡게되었다고 했다. 교칙위반인데도 당당히 게임기를 갖고다니는 것도 그렇고 귀찮은 일이 있으면 귀찮다는 티라는 티는 다 내는것도 그렇고 전혀 반장을 해먹을만한 인재는 아닌데 이상하게 아이들은 세하를 잘 따랐다.
단지 문제 많은 전학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타에게는 세하가 붙여졌다. 이전에도 몇번 있었던 일이다. 반장이든 부반장이든 대충 급식실이 어디인지, 과학실이 어디인지, 도서실이 어디인지 그 정도만 알려주고는 다시 제 무리로 돌아가고는 했다. 이세하도 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을 이유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세하는 첫날 이후로도 쭉 나타 옆에 붙어다녔다.
선생님이 너 잘 챙겨주라고 했어.
나타가 좀 꺼지라고 할 때마다 꼬박꼬박 이런 이유를 들어가면서.
세하는 반장주제에 공부는 썩 잘하지 못했지만, 운동을 잘 했다. 각종 무술 유단자라는 얘기를 들었던 것도 같다. 부모 빽이 장난이 아니라는 점도 가세해 세하는 일진들의 비무장지대쯤에 해당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런 세하가 나타에게 붙어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이전 학교에서처럼 나타에게 가해지던 괴롭힘은 차단될 수 있었다. 그것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 외에는, 글쎄.
가끔 등교할 때 교문 밖에서 마주치면 아는체를 하는 정도가 아니라 쪼르르 쫓아와서 계속 말을 걸었다. 매 교시마다 숙제를 했는지 안했는지 체크했고, 하지 않았으면 나타를 재촉해 쉬는시간에라도 하게 했으며 점심시간이면 꼭 나타와 같이 급식실에 갔고 나타가 가는곳마다 따라다니려고 했다.
처음엔 귀찮아서, 짜증이 나서 버럭 소리를 질러가며 세하의 친절을 거부했지만 몇주가 지나고 한달이 넘어가자 나타도 반쯤은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세하는 끈질겼지만 나타에게 강요하는 법은 없었다. 보통은 권유였고, 나타가 짜증을 내기 시작하면 시무룩한 표정으로 물러서고는 했다. 다른 아이들마냥 예민한 질문을 던져서 나타를 화나게 하지도 않았다. 세하는 나타의 가정사 및 과거에 대해 전혀 모르는 척 굴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귀찮음이 생소함이 되고 신기함이 되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기 뭐 묻었어."
"엉."
자신이 이세하에게 편하게 대한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뭐가 늦어버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렇든, 무엇이 되었든, 나타 스스로 과거에 제가 이세하에게 대했던 태도로 돌이키질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놀랍고 수치스럽기보다는 당혹스러웠다. 이제는 세하가 말을 걸어오면 대충이라도 대답을 해주었고, 점심 먹으러 가자는 소리에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으며, 작은 접촉에도 놀라는 일 없이 무덤덤해졌다. 어쩌다보니 하교할 때에도 버스정류장까지는 꼭 같이 가게 되었다. 그쯔음 세하가 나타에게 익숙해졌다는게, 더 익숙해질 것이라는게 나타에게는 일종의 공포로 다가왔다.
그 섬찟함을 확 느낀 것은 여느때와 다를 바가 없었던 토요일 오후, 수업이 파한 후 하교하려 할 때의 일이었다. 청소까지 모두 끝난 후 온 교실의 아이들이 거의 다 빠져나갔을 쯤이었다. 운동장에 남아서 축구를 하는 아이들의 함성소리와 느즈막히 하교하는 복도 밖 아이들의 목소리는 먼 곳의 소리처럼 들렸다. 여름과 가을의 경계에 선 오후는 고즈넉했고 서늘하고 따스했다. 의자에 물먹은 빨래마냥 널부러져서 나타는 반쯤 졸고 있었다. 복도에서 종알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마저 씻은 듯 사라졌을 때, 그리고 나타가 막 잠에 빠져들려고 했을 때 교실문이 열렸고, 세하가 빼꼼 고개를 들이밀었다.
"어, 안 갔네? 나 기다리고 있었어?"
이세하가 무슨 말을 한건지 나타는 순간 인지하지 못했다. 십초 정도, 세하가 교실을 가로질러 나타 옆으로 올 때 까지 나타는 세하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곱씹어보다가, 결국 깨닫고는,
순식간에 귀 끝까지 빨개졌다.
"나타?"
나타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음을 읽었는지 세하가 걱정스런 얼굴로 나타의 어깨에 손을 가져다 대려 했다. 그 순간 나타는 거의 세하의 팔을 부러뜨릴만한 세기로 세하의 손을 쳐냈고,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뭐라고 소리를 질렀으며-아마도 내가 미쳤냐 라던지 뭐 그런 말이었던것 같다-, 가방을 챙길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버스정류장까지 뛰어갔다.
나타는 세하와 함께 하교하려 그때까지 교실에 남아있었다.
그게그렇게, 나타에게 힘들었다.
버스정류장까지 와서야 나타는 가방을 교실에 놓고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다시 가서 세하와 마주치기는 싫었고, 버스정류장에서 계속 서성거리면 어차피 이쪽이 하교길인 세하가 올 것 같았다. 결국 나타는 그날 시설까지 두시간 정도 되는 거리를 걸어서 갔다. 아주 나중에야, 세하가 날이 저물도록 나타가 두고간 가방을 앞에 두고 나타를 기다리다가 경비아저씨에게 쫓겨 집에 갔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이세하는 정말 병신이다. 그래놓고서 월요일에는 나타에게 제가 잘못했다고 빌었다. 사실 세하가 잘못한 것도 없거니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아서 나타는 어물쩍 넘어가줬다.
병신,
이세하 병신새끼.
지금도 그때와 비슷한 정도의 울화가 솟구치는 듯 했다. 나타는 이세하가 그렇게 호구처럼 구는 것이 싫었다. 귀찮은 일은 하기 싫어하면서, 맡겨진 일은 마지못해 하는 주제에, 모두에게 애매하게 친절하게 구는 것이 싫었다. 다른 아이들에게 하는 것보다 나타 자신에게 그러는 것이 더욱 싫었다. 어차피 이세하는 담임선생님이 시켜서 하는 일이다. 나타에게 친절한 것도, 잘 챙겨주는 것도, 항상 붙어다니려고 하는 것도 모두 다. 이세하 스스로 하고싶어서 하는 일도 아닌 주제에 쓸데없이 성실하다. 위선자. 맞아. 그런 녀석을 위선자라고 지칭했던 것 같다.
이세하에게 고백한 여자애도 분명 이세하의 친절과 호의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니 저렇게 이세하를 불러내어 당당히 고백을 하고, 왜? 라는 질문까지 했겠지. 보통 고백하고 나서 차였다고 왜? 라는 소리를 하지는 않는다. 여자애는 이세하가 자신의 고백을 받아줄 것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나타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피곤이 확 밀려왔다.
*
"나타, 여기 있었어?"
멍하니 전방을 주시하고 있다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타는 벌떡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해는 거의 져버려, 이제 운동장에 남아있던 아이들도 뿔뿔이 흩어졌고, 교정에는 아이들이 남아있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땅거미가 지는 것으로 보아 앉아있은지 한참 된 것 같았다. 여태 집에 가지 않고 나타를 찾아다닌 것인지, 세하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타는 다시 짜증이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타는 대답하지 않고 굳은 얼굴로 세하를 지나쳐 걸었다. 세하가 나타의 팔을 잡아채려다가, 나타의 매서운 눈길에 멈칫 하며 손을 거두었다. 걸어가는 나타의 뒤에서 세하가 소리쳤다.
"내가 또 뭐 잘못한거 있어?"
나타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게, 나도 네가 잘못한 게 있었으면 좋겠다. 세하는 사실 잘못한게 없다. 나타도 알고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나 화가 날 수가 없었다. 갑작스레 이유없는 억울함이 북받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제어하기 힘든 감정의 격류에 휩쓸려 나타는 결국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그 여자애는 그러고 그냥 보냈냐?"
".....어?"
세하는 당황한 듯 했다. 목소리부터 그런 기색이 역력해 나타는 그 꼴을 보려고 뒤를 돌아보았다. 최대한 비웃는 표정을 지을 수 있길 바라면서. 세하는 나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까 전 여자애에게 지었던 것과 비슷한 한숨을 한 번 더 내쉬었다. 나타의 미간이 팍 일그러졌다.
"봤어?"
"보면 안돼?"
"어디까지?"
"좋아하는 애 있다고 한 거까지."
아. 세하가 난처한듯 시선을 돌리며 울상인 표정을 짓는다. 나타는 다시 울화통이 치밀어 소리쳤다.
"네가 아무한테나 다 잘해주니까 계집애들이 네가 자기한테 호감갖고 있는줄 알고 고백을 하는거잖아. 왜 네가 피해자인 것마냥 그따위 표정을 지어?"
"그건.... 내가 잘못한건 아니잖아. 일부러 차갑게 굴 필요도 없고, 지나치게 걔한테 친절했던 것도 아닌데 내가 왜 그런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나타의 질책이 세하는 못마땅한 눈치였다. 둘은 말없이 한참을 마주서 있었다. 나타는 할말이 없었다. 잘못이 아닌 것은 맞으니까. 다만, 평소엔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도 그냥 자신이 잘못했다며 숙였던 세하가 왜 갑자기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지 나타는 그것이 조금 당혹스러웠다. 대꾸한 말이 궁해진 나타는 입을 우물거리다가 그냥 아무 말이나 나오는 대로 주워섬겼다.
"아, 아무튼 짜증난다고 너! 괜히 착각하게 만들지 마!"
"그정도 가지고 착각하는 애가 이상한거 아냐?"
"착각할 수도 있지! 아니 그리고, 착각은 안하더라도 네가 그렇게, 어? 그런식으로 굴면 좋아하게 될 수도 있는거라고! 근데 넌 좋아하는 사람 따로 있잖아! 그러니까 네가 나빠! 그런건 좋아하는 사람한테나.... 그렇게 하는 거 아냐?"
세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조금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이상하게도 세하의 그 표정을 보자 나타는 덜컥 겁이 났다. 자신이 말을 잘못 한 것 같았고, 세하에게 상처를 준 것만 같았다. 세하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나타는 뒤돌아 빠르게 걸었다. 세하는 뒤따라오지 않았다.
*
해는 완전히 져버려서, 사위가 캄캄했다. 가로등 불빛도 잘 닿지 않는 구석이라 세하가 서 있는 곳은 간신히 사람의 윤곽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세하는 한참 고개를 떨구고 있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타에게, 그런식으로 비춰질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 여자애에게 지나치게 친절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사실, 세하가 누구에게 친절한 편은 아니다. 그냥 거절하는게 귀찮은 것 뿐이지. 최근 자발적으로 친절하고, 자신이 좋아서 챙겨준 적은 몇 없었다. 그나마도 다 한 사람에게만 그랬다.
좋아하는 사람한테나 그렇게 하는 거라고.
"그러고 있는데."
하, 웃음이 났다. 세하는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착각하게 만들지 말라고?
"착각이나 해줬음 좋겠네."
귀 끝까지 빨개진 나타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너야말로 착각하게 만들지 마. 세하는 작게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뭐가 꽉 메인 것 같이 가슴이 답답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end-